1. 아빠는 천둥 번개나 벼락 같은 사람이다. 벼락 같은 축복 그런 게 아니고 성질이 급하고 목소리가 크다는  거. 나는 그걸 대충 반쯤 닮은 것 같고 동생은 반도 못 닮았다. 아빠를 못 닮아서 그런지 나는 동생이 깊은 바다에 사는 큰 물고기 같다고 생각한다. 그러고보니 얘는 문신도 물고기랑 거북이다. 그러고보니2 얘 태몽도 물고기였다. 그런데 우리 둘 다 수영은 못 한다. 아빠는 배운 적도 없는 수영도 선수급이라고 아빠랑 한 때 사귀었던 여자 분이 그러니까 엄마가 그랬다. 학창 시절 아빠는 높이뛰기 선수였고, 씨름도 했었다. 운동선수나 연예인은 빌어먹기 딱 좋은 직업이라고 할아버지가 반대해 포기했지만. 여튼 큰 체격과 목소리로 줄곧 친구들 중 대장 노릇을 했고 공부를 안 해도 시험은 일등이고.
작년에 아프기 전까지 세상에서 아빠만큼 대단하고 뭐든 잘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. 사실 몸이 아픈 지금도 어지간한 게으름뱅이의 다섯 배 쯤은 빠르다. 뇌경색에 수반되는 기억력 감퇴조차 그 나이에 그 정도도 기억력이 안 흐려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… 싶을 정도라. 아빠가 쓰던 단어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한탄하는 옆에서 아픈 곳 없이도 단어를 기억을 못하는 젊은 나와 그 단어의 존재조차 모르는 더 젊은 동생이 머쓱하게 앉아있는 2 주 였다. 남편까지 우리 셋이 무슨 얘기를 해도 그 업계를 알고 있거나 그 업계를 아는 사람을 안다. 아빠가 나이 들고 아파서 약해진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젊은 시절의 천둥 같던 아빠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다행스럽단 마음이 요즘에야 든다. 어릴 땐 참 싫었는데.

2. 살림도 다 못 채워넣고 정리 안 된 어수선한 집을 둘러본 아빠가 우리를 다소 한심해했다. 아 우리 한창 바쁜 맞벌이 부부라고… 해명을 시도해도 맞벌이 주말 부부로 애를 둘이나 키운 사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지.
아빠는 우리 집 마당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과실수는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울타리에는 나무를 더 심어야 하며 데크 위 플랜터를 치우고 새로 갈아낸 다음 새로 스테인으로 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. 아빠가 다 해치운다는 얘기다.
우리 집 거실은 두 개 아니 지하까지 세 개인데 가구는 1층 거실에만 쇼파 둘 티비 둘 이라는 이상한 구성을 한 상태였고 아빠는 대체 집을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고 어떻게 사냐며, 응접실엔 의자와 식물을 놓고 윗층으로 큰 티비랑 쇼파 하나를 옮겨야겠다고 했다. 이것도 아빠 돈으로 아빠가 하겠다는 얘기다.
2주 동안 하루 꼬박 걸리는 국립 공원 두 군데와 시내 공원 두 군데 방문, 친지와의 저녁식사 두어 번, 여러 쇼핑몰 구경과 틈틈이 외식까지 하면서 이 모든 것을 다 끝내고도 심지어 시간이 남아서 우리 차고 정리까지 아빠가 다 했다. 어차피 이 세상에 아빠 맘에 들게 아빠 속도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빠 뿐이라서 난 그냥 필요하다는 물건이나 찾아줬다. 내 집이니 내가 하게 두라는 말을 안 먹힌다 이미 이사 4달 차에도 여전히 갓 이사온 듯한 꼬라지인 걸 보인 다음엔. 그나마도 집에 없는 게 많아서 사다가 날랐다. 동생은 그 짧은 시간에 여기 존재하는 모든 공구전 체인을 골고루 다 가봤고 집 근처 지점은 그새 길도 외웠다. 나야 그 중 일주일은 출근을 했으니 탈출이 가능했지만 동생은 꼼짝 없이 붙들려 아빠의 일처리에 콩알마냥 달달 볶였음.

퇴근 할 때마다 집이 바뀌는 걸 목격한 남편은 동생 용돈이라도 주라며 딱해하고 동생은 형이 퇴근해도 쉬지 못하고 아빠 일 하는 주변에서 안절부절 하는 걸 보며 안타까워했다. 동생이는 결국 여기서 받은 용돈과 내 카드로 쇼핑을 꽤 쏠쏠하게 (정도가 아니라 백 만원 쯤;) 해갔고 남편은 자기는 한 해가 다 가도 못할 만큼의 일이 끝난 집에 살게 됐고 아빠는 본인 마음 내키는 만큼 넓은 전원주택 가꾸기에 열중할 수 있었으니(…) 결국 우리 모두 윈윈이라고 나 혼자 뻔뻔하게 우겼다.

3. 동생이 아들이라 조부모님들에게 더 대접 받고 귀애받은 것들을 기억하지만 나이 차가 나는데다 내가 손녀 중 가장 예쁨 받은 축이라 딱히 서러울 것은 없었다.
부모님은 아직 전통적인 성역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눈치를 좀 보는 편이고.
언젠가 엄마가 아빠가 너만 너무 예뻐해서 동생에게 눈치가 보여 동생한테 부러 더 잘 해줘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게 과장이 조금 섞였다고 생각했거든. 그래도 아들, 그것도 세상 귀한 늦둥이 아들인걸.

근데 이번 방문에서 느꼈다… 아빠는 확실히 나를 좀 어려워하고 (나이차를 감안하면 동생이 결혼할 즈음엔 물질적인 지원의 양은 따라잡겠지만)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내게 훨씬 더 투자를 많이 했고 또 해주고 싶어한다. 내가 워낙 손 쓰고 몸 쓰는 일을 안 해봤으니 안 시키고 싶어하고, 더 정확히는 공부로 먹고 사는 애는 몸 쓰는 일을 시키기 아깝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. 가족끼리 무거운 걸 들 일이 있을 때면 으레 느이 누나가 어떻게 저런 걸 하느냐 네가 해야지, 한다. 뭐 체격차가 워낙 크고 동생이 손재주가 있긴 하지만 손재주 없고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엄마가 힘을 쓸 때는 안 그러니깐.
동생은 우리 집에서 낮에는 아빠가 시키는 일을 하고 저녁엔 상 차리고 설거지를 했다. 내가 설거지를 하면 아빠가 동생이가 꼼꼼히 설거지도 잘 하는데 네가 무슨 설거지까지 굳이 하느냐고 했다.

근데 내가 나중에 동생 집에 가게 되면 과연 나한테 동생이 한 만큼의 집안일을 하거나 사소한 뒤치닥거리를 시킬까…? 내가 한다고 나서면 모를까 절대 아닐 거 같아. 그러니까 동생이 힘들다면 내가 같이 사업을 하거나 돈을 보태 줄 궁리를 하는 건 상상이 되는데 내가 누나라고 얘 집에 가서 자잘한 살림을 도와준다던가 하는 거는 상상이 안 돼.
보통 여자 형제랑은 반대로 내가 가진 게 일종의 가상장남의 지위인 듯 하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. 남편이도 마침 얌전한 며느리 상에 (…??) 부합하는 사람이네.

+ 동생은 지 입으로 내가 원래 엄마아빠 말을 잘 듣는다고, 가끔 짜증은 내도 부모님이 시키는대로 잘 한다고 한다. 나같으면 아빠 닥달에 언성 높히는 불효 한 번 저지를 텐데. 실제로 20대엔 저지르기도 했고.
엄마 아빠는 내노라 하는 쌈닭이고 나도 일단은 화를 잘을 안 내지만 한 번 발동 걸리면 숨기지를 못 하는 편인데 어떻게 동생같은 돌고래 같은 대형순둥귀요미가 태어난걸까? 우리 집 최고의 인성 아웃풋일세…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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